오랜만에 글을 쓴다. 뭔가 거창한 이유는 없고 그냥 쓸 생각이 안 들었다.
장난이다. 사실은 회사에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나도 바쁘게 개발하고 있고, 다른 팀원분들도 바쁘게 달리고 있다.
앞으로의 회사의 방향을 결정할 매우 중요한 제품이고, 감사하게도 그 제품의 가장 밑 벽돌을 쌓는 일을 다른 분들과 함께 내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벽돌을 나르고, 쌓고, 만들며 지내다가 그날이 왔다.
중간 점검차 벽돌과 여러 재료들을 모아, 건물이 제대로 지어졌는지, 엉성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는 날이 온 거다.
내가 만든 부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부분들이 잘 이어지고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어차피 망가질 거 알고서 진행하는 거고,
어디가 망가질지를 찾고서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함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미팅에 들어간 찰나
어쩌다 보니 내가 시연하는 걸 진행하게 되었다! 덜덜덜
어…
어..?
앗…
중요한 블록들은 다 만들어졌지만 생각보다 구멍들이 많았다.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자 ‘변기에서 물 내리는 상황’ 테스트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변기 버튼 부품 수급이 안 돼서 물을 잔뜩 넣어 수동으로 내려야 해요!
일단 물은 잘 내려져요!!
자 이번엔 정수기가 깨끗한 물을 잘 내려주는지 테스트해보겠습니다!
엇.. 왜 검은 물이..
(혹시 석유인가요 같은 드립도 치고)
앗 다시 보니 필터는 제 자리에 있는데, 연결이 미흡했네요!
이거 연결하면 깨끗한 물이 나올 거예요!
그런데 놓쳤던 구멍들이 연속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너무 많이 속상하다. 이거 끝낼 순 있을까?
오늘 나는 엄청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겠지? 아 정말 내 역량이 많이 부족한가?
이런 걸 잘 털고 일어나야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난 그냥 평범하게 안주하고 작은 일들만 하면서 지내야 할 사람인가?
미팅이 끝나고, 당장 채울 수 있는 구멍들부터 채우고 막은 뒤에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이켜보니 내 일이 잘 안 된 걸 걱정하는 것에서 멈춘 게 아니라, 팀의 프로젝트를 걱정하고 있잖아?
근데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건 내가 책임감을 느낀다는 거잖아?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니까 더 자극받고 더 열심히 할 수 있겠구나?
.. 어 이거 그건데!
나는 생각이 많은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 슈퍼맨 이야기
이렇게 윗 부분까지 적어둔게 저번주였다. 사실 졸려워서 글을 끊었다.
그리고 주에 52시간을 꽉꽉 채워가면서 결국 글로벌향 제품을 앱스토어에 올렸다.
솔직히 몸은 많이 힘들었지만..
단순히 티켓을 쳐내듯 개발하는게 아니라, 팀원들하고 장난도 치고 기술적으로 새로운 시도도 여러번 하면서 많이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는 의미있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좋은 기억으로 계속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다.
만약 내가 계속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고, 이런 감정들에 예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을까?
또 그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나오는 그 불 친구가 사는 거 아닌가?
찾아보니까 이 친구 이름은 캘시퍼라고 한다.
아무튼..
적당한 거리에서는 내가 달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 어두운 곳을 밝히거나 추운 곳에 있을 때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주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잘 익은 바비큐가 돼버리니까.
내 감정들에 그저 아파하지 않고, 적당히 떨어져서 열심히 식혀가는 한편,
내 감정들이 내 상황에 대한 신호와 연료로 나를 돕도록 해야지.
물론 열심히 식히면서 말이다.
'Non Computer Scie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라는 거는 전부 안 하고 살았는데 (0) | 2023.09.19 |
---|---|
안녕 (0) | 2023.08.16 |
비가 와야 땅이 딱딱해지지 (0) | 2023.07.09 |
블로그 잘 보고 있습니다 (1) | 2023.05.21 |
야 너네 왜 여깄냐? (0) | 2023.05.15 |